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로후네 사건 (문단 편집) == 일본의 개항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cw.mit.edu/02_115_Powhatan.jpg|width=100%]]}}} || || '''일본인 화가 히바타 오스케{{{-2 (樋畑翁輔, 1813~1870)}}}가 내항 직후에 그린 그림.[* 민간에서 그린 그림보다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려진 미 군함의 그림이다.]''' ||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 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위치)에 입항했다. 사실 막부는 이 사건에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이미 [[네덜란드]]로부터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군함을 출항시켰다는 정보를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https://www.dogdrip.net/384845566|#]][* 일본은 [[제1차 아편전쟁]] 이후 1년에 1번 씩 정기적으로 네덜란드 본국에서 제공되던 오란다 풍설서와는 별도로 해외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관련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즉시 제출하도록 네덜란드 상관에 명령했다. 이를 별단(베츠단) 풍설서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에도 막부는 사전에 미국이 파견하는 군함의 척수와 명칭, 톤수, 대포수와 승무원 수 등의 제원과 지휘관인 페리 제독의 개인 신상까지 알아내었다.] 페리의 원정 목적은 일본과 [[류큐 왕국]](현재 [[오키나와]])의 개항이었고, 심지어 류큐는 군사적 점령까지 고려하고 온 것이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도 막부]]는 늘 하던 대로 시간을 끌어서 흐지부지하려고 했다. 대통령의 친서만을 받고 구체적인 협의는 하지 않았고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페리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 해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페리는 7개월 만인 1854년 2월 13일 우라가에 다시 나타났다.[* [[료마전]]에서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다시 왔을 때, 이 소식을 들은 막부 관리들이 너무 빨리 왔다고 중얼대는 이유가 1년도 채 안 돼서 왔기 때문이다.] 전년도에는 4척이었던 함대를 9척으로 늘려서 데려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의 개항.png|width=100%]]}}} || || '''일본의 개항''' || 결국 막부의 결정으로 일본은 [[에도 막부]] 초기부터 유지한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개항했고,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중간에 내항했던 [[류큐 왕국]]도 1854년에 미류수호조약을 맺었다. [[러시아]] 함대와 [[영국]] 함대도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출몰했다. 막부가 개항한 데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부 정치 사정.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죽자 그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13대 쇼군에 취임했으나, 문제는 이에사다가 병약해서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후계자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막부는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놓고 반으로 갈라지고 만다. 막부의 실권을 쥔 [[다이묘]]들, 즉 신반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들은 기슈 번주인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으나, [[사쓰마]]나 [[조슈]] 등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히토츠바시가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막부는 내부 문제를 단속하기 위해 먼저 외부의 문제부터 해결하려 했고, 그대로 개항으로 이어졌다. 후계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결정된다. 그러나 가장 주된 요인은 군사력의 열위로 개항했다는 것이다. 9년 전 네덜란드를 통해서 대국인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에게 [[제1차 아편전쟁|거하게 털린 걸 알았고]], 해안선을 면한 각 번들의 병력과 막부가 가진 해군력이 매우 형편 없어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걸 페리 내항 이전에 깨달았다. 뒤이어 [[미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일본 측에 심각하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 또한, 개항을 주도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빈고 [[후쿠야마(도시)|후쿠야마]] 번주이자 막부의 로쥬인 아베 마사히로조차 여러 번 이양선 추방령[* 1825년 막부에서 내린 명령으로, 일본의 해안선에 접근하는 외국 배는 보이는 대로 포격하여 내쫓고, 상륙 외국인에 대해서는 체포를 명한다는 내용이었다.]을 부활하고자 했지만, 해안 경비대의 반대로 결국 실패했을 정도다. 한국에선 일본이 무저항[* 개항 이후에도 사쓰마 번, 조슈 번은 각각 한 번씩 영국 함대에게 선빵을 날렸다가 사쓰마는 [[사쓰에이 전쟁]]에서 격퇴하기는 했으나 시가지가 불타고, 조슈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참패하며 개화를 지지하는 노선 변화를 겪었다.]으로 스스로 개항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무저항으로 열어줬다기보단 애당초 '저항할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페리의 함대는 일부러 에도 만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에도는 100만이 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각종 물자들을 대부분 해운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으므로[* 현대에도 철도와 비행기는 해운의 수송량을 따라잡지 못한다.] 미국 함대를 쫓아낼 해군력이 없는 일본으로선 그야말로 목이 졸려지는 것과 같은 치명타였다. 이대로 버티자니 에도의 수많은 인구가 굶어죽을 판이고, 그렇다고 미국 함대를 격파하자니 그럴 해군력이 없고 미국은 문자 그대로 에도막부의 손발을 묶어놓고 개항요구를 한 셈이다. 그래서 흑선개항은 국가간의 외교나 파워게임에서 해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포함외교]] 항목 참조. 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3대 대통령인 [[밀러드 필모어]]였지만, [[미일화친조약]]은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 재임기에 체결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개항을 필모어의 업적으로 넣는다.[* 덧붙여 최초로 일본 외교사절을 맞이한 미국 대통령은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다. 한국 외교사절의 경우 21대 [[체스터 아서]].] [[에도 막부]]의 [[쇼군]]은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였지만, 이에요시가 흑선이 내항한 지 3달 뒤에 병사했기 때문에,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 치세에 조약을 맺었다. 또한 이때 미국 뿐 아니라 [[러시아]] 역시 이즈국 시모다항에, [[영국]]은 에조국 하코다테항에 군함을 몰고 와 개항을 요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